耽羅國主  梁 宕  追遠碑 (文)

國主의 姓은 梁씨 諱는 宕이시니 耽羅國主이시며 原 姓은 良씨 羅의 開荒始祖 良乙那 聖王의 後裔이시다. 歷史가 悠久하고 由緖가 深遠한 國家나 民族일수록 그 始原은 神話에서 發祥하고 있음을 보거니와 梁門 또한 古代 羅의 開國神話에서 發源하고 있음이니 지금濟州市 所在 國家 指定史蹟 文化財 第百三十四號로 指定保護 되고 있는 三姓穴에 傳承되고 있는 三姓神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할 것이다. 古記에 따르면 中國 大陸의 陶唐氏 帝堯와 同時期에 韓半島 北部에서는 檀君이 朝鮮을 建國하셨다 하였고 韓半島 南海上 지금의 濟州道에서는 漢拏山 北 廣壤의 땅 毛興穴에서 誕降하신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 께서 탁라를 開國하셨다 하였으니 우리 梁門의始祖 良乙那聖王은 實로 이 三乙那의 長이시다. 神聖 良乙那 王의 肇國(조국=처음으로 나라를세움)에 關한 記錄은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東國通鑑 等을 비릇하여 私撰地誌인 瀛州誌 耽羅誌 耽羅紀年 等에도 登載되여 있거니와 우리梁門은 淵源이 久遠하며 耽羅에서 만이 아니라 韓土의 著姓名門으로서 連世文武 簪纓(잠영=관원이 쓰던 비녀와 갓끈. 높은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을 누려오신 世族이 었으니 史乘의 顯祖 들만도 枚擧할 겨를이 없거니와 그 中에도 中始祖 耽羅國主 諱 宕의 德行과 名聲은 宗史와 더불어 永世에 빛날 것이며 後孫으로서는 하루도 그 陰德을 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國主는 新羅 奈勿王 十八年에 夫繼良과함께 新羅에 入朝하시고 耽羅史上 初有의 公的 善隣外交를 圖謀하실 때 新羅王은 耽羅國主의 淸高하신 氣像과 寬雅하신 容範에 感佩(감패=감사하여 잊지않음)하시어 盡誠으로 歡待하시고 重賞爵祿과 함께 錦繡衣冠을 贈進하시는한편 賜姓의 典禮에따라 良字 姓을 고쳐 梁字姓을 쓰시도록 하셨다 하였으니 이리하여 國主以降의 子子孫孫은 梁字姓을 쓰게 되었다고 함이다. 우리 後孫들이 이 中始祖의 職啣을 國主로 모심은 先祖로부터의 遺訓일뿐아니라 東京大學 所藏本 耽羅誌를 비릇한 主要 史料에 依함이요 그 新羅入朝의 時期를 瀛州誌에서는 新羅烈宗朝라 하였으나 新羅 王系에는 烈宗이 없으며 編禮抄附記에 東晋 孝武帝時라 하였고 梁門世傳의 古文書에는 東晋烈宗初라 하였으니 이를 東晋孝武帝 烈宗 寧康 元年으로 잡는다면 神聖 良乙那王께서는 羅를 肇國하신지 二千七百六年이 되는 新羅 奈勿王 十八年 癸酉가 되는 것이요 西記 三百七十三年이 되는 것이다. 이는 高句麗 小獸林王 三年 百濟 近肖古王 二十八年 日本으로서는 百濟의 王仁 博士에 依하여 論語와 千字文이 東傳되었다는 應神王 十五年에서 二十年쯤 前時期가 되는 것이다. 이 時期가 韓土로서는 連이은 王朝의 興替期로서 不安定한 時代였음에 反하여 韓土 三國이나 耽羅와 日本列島에 있어서는 새로운 文運이 胎動하던 時代였으니 이러한 內外 情勢下에서 善隣外交를 通한 耽羅의 位相定立과 家門榮顯을 爲하여 不朽(불후=썩지아니함.영원히 없어지지 않음)의 業績을 남기신 國主의 生涯에對하여 우리 後孫들은 限없는 敬慕追遠의 情을 禁할 수가 없도다. 國主의 後孫들은 八域에 散居하며 오랜時代를 거치시는동안 濟州와 南原과 忠州로 分貫되셨는 바 貫 濟州는 星主 諱 具美와 漢拏君 洵을 貫 南原은 兵部郞中 東宮內侍講學士 諱 能讓과 龍城府院君 諱 朱雲과 帶方君 諱 水精을 貫 忠州는 蘂城府院君 諱 能吉을 各起世祖로 모시고 있거니와 지난 己未年에는 大同譜를 編纂하였고 뒤이어 壬申年에는 國主를 奉祀하기爲한 聖域化事業이 着工되더니 오늘 그 始役 七年만에 全 後孫의 獻誠으로 禮成을 보기에 이르렀음이다. 後孫 우리들은 여기 造成된 聖域을 始祖誕降의 乾始를 이은 聖地라하여 乾承原이라 題名하고 祀廟를 廣運仁德하신 國主를 모시는 殿宇라하여 廣德殿이라 題名함과 아울러 良乙那聖王의 祀廟인 三聖殿과 함께 宗門 最大의 聖殿으로 尊崇하게 되었음이니 이 廣德殿이 後孫에게는 永遠한 崇先의 表象이요 愛族의 敎場이며 裕後의 殿堂이 될수 있기를 삼가 祈願할 따름이로다.

耽羅開國 四千三百三十二年 己卯 十月 十一日    

末裔孫  文學博士  重海 謹撰    

 

簪=비녀잠              

纓=갓끈영